박충수(朴忠秀, 1545~1592)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경원(景源), 호는 설봉(雪峯)이다. 그는 선조 재위 시기에 활동하며 관직에 몸담았으며, 임진왜란 당시 전장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하다 순국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가계로는 박충좌(朴忠佐)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박승익(朴承翼)이다.
그는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2년 뒤인 1572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며 본격적인 공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승문원 권지부정자를 거쳐 예문관 검열에 임용되었으며, 이후 성균관 전적과 사헌부 감찰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행정적 역량을 쌓았다. 그는 관직 생활 내내 강직한 성품으로 업무를 처리하여 조정 내에서 신망이 두터웠다.
박충수는 중앙 관직뿐만 아니라 지방관으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충청도와 평안도 등 여러 지역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 특히 부당한 세금 징수를 막고 지역 사회의 교화에 앞장서는 등 유교적 민본 사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이러한 치적은 당대 관료들 사이에서도 모범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박충수는 전란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갔다. 당시 그는 충주 방면에서 북상하는 왜군을 저지하기 위해 분투하였으나,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과의 격전 끝에 장렬히 전사하였다. 전란 초기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희생정신은 후대 신하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사후에는 그의 충절을 기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그의 삶과 죽음은 조선 시대 선비가 지녀야 할 충(忠)의 가치를 몸소 보여준 사례로 평가받는다. 현재 그의 묘소와 관련 기록은 후손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으며, 충신으로서의 행적은 여러 읍지와 인물지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