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화(朴昌和, 1889~1962)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남당(南堂)이다. 그는 한학에 깊은 조예를 가졌던 인물로, 국권을 상실한 시기에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독립 의지를 고취하기 위해 역사 연구와 실천적 독립 투쟁을 병행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박창화는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독립대동단(朝鮮獨立大同團)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인재를 포섭하는 데 힘을 쏟았다. 또한 만주와 중국 각지를 돌며 독립군의 활동을 지원하고 민족 교육을 실시하는 등 다각적인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활동 중 특기할 만한 점은 일본 내에서의 행적이다. 박창화는 일본 궁내성 도서료(圖書寮)의 촉탁으로 근무하며 일제가 약탈해간 수많은 한국 고서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기회를 활용해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우리 역사의 실상을 파악하고 귀중한 사료들을 필사하여 보존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신라 시대의 기록인 『화랑세기(花郞世記)』를 필사하여 전한 인물로도 유명하며, 비록 해당 문헌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쟁이 있으나 그의 학술적 열정과 민족 사학 정립을 위한 노력은 높이 평가받는다.
광복 이후 박창화는 귀국하여 성균관대학교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우리 역사 연구에 매진하였다. 그는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며 오직 학문적 진실과 민족 정기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창화의 생애는 지식인이 자신의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일제의 역사 왜곡에 저항하고,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기 위해 어떻게 투쟁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그의 연구 성과와 독립을 향한 일념은 오늘날 한국 고대사 연구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