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익(朴贊翊, 1884~1967)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핵심 정치인이다. 본관은 반남, 호는 남파(南坡)이며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말기 신학문을 익히며 국권 회복 운동에 관심을 가졌으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망명하여 만주와 중국 본토를 무대로 평생을 항일 투쟁에 헌신하였다. 그는 대종교에 귀의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독립운동 세력의 단결과 외교 역량 강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망명 초기 박찬익은 만주 지역에서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관여하며 독립운동의 물적, 인적 토대를 닦았다. 이후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참여하여 외교와 정무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그는 중국어에 능통하고 중국 정계의 사정에 밝아,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 정부 사이의 가교 역할을 전담하였다. 이러한 외교적 수완을 바탕으로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 고위층의 신뢰를 얻어냈으며, 이는 임시정부가 중국 내에서 활동 거점을 확보하고 재정적 지원을 받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될 당시 박찬익은 성립 전례 위원으로서 실무를 총괄하며 군사 조직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광복군이 중국 군사 당국으로부터 독자적인 작전권을 인정받고 원활한 보급을 받을 수 있도록 끈질긴 협상을 이어갔다. 또한 임시정부 내에서 국무위원, 법무부장 등 요직을 거치며 내부 결속을 다졌고, 좌우합작 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여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정치적 노선은 파벌에 치우치지 않고 민족의 대동단결을 우선시하는 합리적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이 찾아왔으나 박찬익은 즉시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남아 주화대표단 단장으로서 사후 수습에 매진하였다. 당시 중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한인 동포들의 안전한 귀국을 돕고, 그들의 재산권을 보호하며 현지 당국과의 마찰을 조정하는 중책을 수행하였다. 동포들의 환국 절차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1948년에야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정부 수립 이후에도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박찬익은 평생을 독립운동의 막후 기획자이자 외교 전문가로 살았으나,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성품을 지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그의 생애는 무장 투쟁뿐만 아니라 외교와 행정, 동포 보호라는 다각적인 방면에서 독립운동의 외연을 넓힌 선구적인 사례로 평가받으며, 오늘날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