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채

박건채(朴建采, 1903~1983)는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그는 1929년 전국적으로 확산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중 한 명으로, 학생 신분으로 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본관은 충주이며, 평생을 독립운동과 전후 교육 발전에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3일, 일제에 항거하는 학생 시위를 주도하였다. 당시 광주와 나주를 잇는 통학 열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들의 한국인 여학생 희롱 사건이 발단이 되자, 박건채는 독서회 중앙본부의 간부로서 학생들을 조직하고 격문을 배포하는 등 시위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학생 간의 충돌을 넘어 거국적인 독립운동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박건채는 시위 주동자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1930년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힘든 생활을 이어갔으나, 민족 해방을 향한 신념을 굽히지 않고 사회운동과 교육 운동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교육을 통한 국가 재건에 힘을 쏟았다. 그는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와 조선대학교 부속중학교의 교장을 역임하며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특히 전쟁과 혼란의 시기에 학생들이 올바른 민족관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광주 지역 교육계의 원로로서 존경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건채의 삶은 청년기에는 항일 투쟁의 선봉에 서고, 장년기에는 교육자로서 나라의 기틀을 다진 헌신적인 독립운동가의 전형을 보여준다. 현재 그의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