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카쿠씨(六角氏)는 일본의 무가 가문으로, 우다 겐지의 후손인 사사키씨의 분가 중 하나다. 가마쿠라 시대부터 무로마치 시대를 거쳐 전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미국(현 시가현) 남부를 지배했던 슈고 다이묘이자 센고쿠 다이묘다. 가문의 명칭은 교토의 롯카쿠 도오리에 저택을 두었던 것에서 유래했으며, 사사키 요리쓰나가 처음으로 롯카쿠라는 성씨를 사용하며 가문을 창설했다.
무로마치 시대에 롯카쿠씨는 오미국의 슈고로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며 막부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세력 확장의 과정에서 막부와의 갈등이 빈번하게 발생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9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롯카쿠 다카요리를 토벌하기 위해 직접 오미로 출진한 '마가리노 진'이 있다. 이 시기 롯카쿠씨는 험준한 지형을 활용한 간논지성을 거점으로 삼아 막부의 공격에 저항하며 독자적인 영지 지배력을 강화했다.
롯카쿠씨의 전성기는 롯카쿠 사다요리 시절에 정점에 달했다. 사다요리는 뛰어난 군사력과 정치력을 바탕으로 주변 영주들을 압도했으며,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승계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며 중앙 정계의 실권자로 군림했다. 특히 그는 성하 마을의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일본 역사상 최초로 상업 통제를 철폐하는 '라쿠이치(楽市)' 제도를 시행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는 훗날 오다 노부나가가 채택한 라쿠이치 라쿠자 정책의 선구적인 모델이 되었다.
전국 시대 후기, 롯카쿠 요시타카와 요시하루 부자 대에 이르러 가문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상락을 시도하던 오다 노부나가가 오미를 침공했다. 롯카쿠씨는 이에 맞서 저항했으나 간논지성 싸움에서 패배하며 거점을 잃고 본거지에서 축출당했다. 이후 롯카쿠씨는 게릴라전을 전개하며 오다 군에 끝까지 저항했으나, 끝내 다이묘로서의 지위를 회복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롯카쿠씨는 비록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멸망했으나 그들이 남긴 통치 체제와 법 제도는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롯카쿠씨가 제정한 분국법인 '롯카쿠씨시키모쿠'는 가신단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문서로, 당시의 법제사와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이들이 축조한 간논지성은 중세 산성에서 근세 성곽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