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이중극(東方二重劇)은 20세기 초 한국에서 유행했던 연쇄극(Kino-drama)의 한 형태를 일컫는 용어이다. 이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실연과 미리 촬영된 영화 화면이 결합된 독특한 공연 양식이었다. 1919년 김도산이 이끄는 신극좌가 단성사에서 상연한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가 그 시초로 평가받는다. 당시 연극은 실내 무대의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야외 촬영 장면이나 역동적인 액션 장면을 영화로 제작하여 연극 도중에 삽입하였다.
연쇄극의 구조는 연극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다가, 무대 장치로 구현하기 어려운 장면이 나오면 하얀 스크린이 내려오고 영사된 화면이 상영되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한강에서의 격투나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 넓은 벌판에서의 추격전 등은 무대 위에서 재현하기 불가능했기에 영화 기술을 빌려 처리했다. 이러한 연극과 영화의 이중적인 구성 덕분에 관객들은 연극의 현장감과 영화의 시각적 확장성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동방이중극의 효시인 《의리적 구토》는 한국 영화사의 기점으로 간주된다.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첫선을 보인 이 작품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한국인이 자본을 대고 제작에 참여한 최초의 영화적 결과물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기념하여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제정하였고, 이는 한국 영화가 연쇄극이라는 과도기적 단계를 거쳐 독자적인 예술 영역으로 발전했음을 증명한다.
동방이중극이 등장한 배경에는 당시의 기술적 한계와 대중의 새로운 볼거리에 대한 갈망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완전한 극영화 제작이 어려웠던 시기에 연극과 영화의 결합은 제작비를 절감하면서도 영화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비록 촬영과 현상 과정에서 일본의 기술적 지원을 받는 등 한계가 있었으나, 서사 구조와 출연진이 한국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사적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이후 동방이중극은 영화 제작 기술이 점차 고도화됨에 따라 순수 극영화로 대체되는 과정을 겪었다. 1923년 윤백남의 《월하의 맹세》와 같은 본격적인 장편 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연쇄극은 한국 대중 예술의 주류를 형성하였으며,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가 한국 사회에 수용되고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가교 역할을 수행하였다. 오늘날 동방이중극은 단순한 혼합 장르를 넘어, 한국 영상 문화의 태동을 알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