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1573년 - 1640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정치가로, 특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의 활약이 두드러진 인물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그의 출생 연도는 일반적으로 1573년으로 알려져 있다. 젊은 시절 군사적 재능이 면면히 드러난 김덕령은 무과에 급제하여 군복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임진왜란 발발 후, 의병을 조직하여 왜적에 맞서 싸웠다. 특히 1597년의 정유재란에서는 턱없이 부족한 병력과 자원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했으며, 그의 용감함과 지략 덕분에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김덕령은 조선 왕조의 군사 전략을 재편하고, 조선 수군과 협력하여 국토 방위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전쟁이 끝난 후, 김덕령은 군사적 업적을 인정받아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경력은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1620년대에 한 인물과의 갈등으로 인해 무고한 누명을 쓰게 되어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 사건은 조선 사회의 정치적 갈등과 권력 다툼을 여실히 드러내는 사례로 남아 있다.
김덕령은 죽음 이후에도 그의 전투와 용기, 그리고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후대에 전해져, 조선의 충신으로 기억되고 있다. 오늘날 그는 의병의 상징적인 인물로 여겨지며, 그의 이름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조선의 무예와 충절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