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석씨(慶州 昔氏)는 신라의 왕성 중 하나로, 시조는 신라 제4대 왕인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탈해는 왜국 동북방 1,000리 지점에 위치한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는 궤짝에 담겨 동해안의 아진포(阿珍浦)에 도달하였으며, 한 노파에 의해 구조되어 길러졌다. '석(昔)'이라는 성씨는 까치가 날아와 궤짝을 알렸다는 설화에서 까치 작(鵲) 자의 왼쪽 변인 조(鳥)를 떼어내어 만들어졌다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
신라 초기 경주 석씨는 박씨, 김씨와 더불어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며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탈해이사금을 시작으로 벌휴이사금, 내해이사금, 조분이사금, 첨해이사금, 유례이사금, 기림이사금, 흘해이사금에 이르기까지 총 8명의 왕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신라의 초기 정치 체제를 정비하고 영토를 확장하며 고대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데 기여하였으며, 당시 신라 사회의 주요 지배층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서기 356년 제16대 흘해이사금을 끝으로 신라의 왕위 계승권은 김씨 문중으로 영구히 넘어갔다. 이후 석씨 가문은 중앙 귀족 세력으로 남았으나 점차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특히 신라 하대와 고려 시대를 거치며 계보가 실전되거나 가문의 세력이 위축되는 과정을 겪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석탈해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문중을 재정비하고 족보를 편찬하며 가문의 명맥을 잇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었다.
오늘날 경주 석씨는 다른 주요 성씨에 비해 그 인구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이는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의 혼란기를 거치며 많은 후손이 성씨를 바꾸거나 계보를 유지하지 못한 역사적 배경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 석씨는 신라 건국 초기부터 한반도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유서 깊은 가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에는 시조 탈해왕의 위패를 모신 숭신전(崇信殿)이 있으며, 매년 봄과 가을에 제향을 올리며 가문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