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의 기사는 고대 게르만 사회의 종사제(Comitatus)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로마 제국 멸망 이후 게르만 부족들이 유럽 전역에 정착하고 봉건제가 정착됨에 따라, 이들의 전사 문화는 점차 체계적인 기사 계급으로 진화하였다. 초기 게르만 전사들은 부족장이나 군주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맹세하고 그 대가로 무기와 식량, 보호를 제공받았으며, 이러한 주종 관계는 중세 기사도의 핵심적인 기틀이 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마뉴 대제 시기를 거치며 기병 전술의 중요성이 증대되었고, 이는 전문적인 기병 전사 집단으로서의 기사 계급을 고착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게르만 기사의 상징적인 존재는 독일기사단(Teutonic Knights)이다. 12세기 말 제3차 십자군 전쟁 중에 설립된 이 기사단은 성지 보호뿐만 아니라 북동부 유럽의 포교와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검은 십자가가 그려진 흰색 겉옷을 착용하였으며, 프로이센과 발트 지역에서 강력한 군사 국가를 건설하며 게르만 기사 계급의 정치적·군사적 정점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엄격한 규율과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조직되었으며, 동방 식민 운동과 결합하여 게르만 문화권의 팽창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게르만 기사의 무장과 전술은 중세의 기술 발전과 궤를 같이하였다. 초기에는 사슬 갑옷과 원형 방패를 주로 사용했으나, 점차 판금 갑옷(Plate Armor)으로 무장이 강화되었고 마상 창시합과 돌격 전술이 핵심적인 전투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독일 지역의 기사들은 육중한 마력(馬力)을 활용한 충격력을 극대화하여 평원 지대에서 강력한 위용을 떨쳤다. 이들은 롱소드와 랜스뿐만 아니라 메이스와 워해머 같은 둔기류를 실전에서 즐겨 사용했으며, 이는 상대적으로 중무장한 적을 상대하기 위한 실용적인 선택이었다.
기사는 단순한 전사를 넘어 사회적 특권 계층으로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토지를 매개로 주군에게 군사적 봉사를 제공하는 봉건적 계약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기사도(Rittertum)라는 도덕적 규범을 준수해야 했다. 여기에는 용맹, 충성, 신앙심뿐만 아니라 약자에 대한 보호와 예의가 포함되었으며, 이러한 가치관은 중세 독일 문학인 궁정 서사시와 서정시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시종(Page)과 종자(Squire) 과정을 거치는 엄격한 수련이 필요했으며, 이는 기사 계급의 폐쇄성과 전문성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었다.
14세기 이후 화약의 보급과 보병 전술의 발달은 게르만 기사의 군사적 우위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장궁과 쇠뇌, 그리고 초기 총기의 등장은 중무장한 기병의 돌격력을 무력화했으며, 스위스 장창병과 같은 고도로 훈련된 보병대의 출현은 기병 중심의 전술 체계를 붕괴시켰다. 중앙 집권적인 상비군 체제가 도입되면서 봉건적 기사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고, 결국 게르만 기사들은 영주로서의 사회적 지위는 유지했으나 실전 투입되는 전투원으로서의 정체성은 상실하였다. 이는 중세 사회의 해체와 근대 국가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